안면성과 탈영토화 : 변웅필의 작품
홍가이 박사 .
1) 얼굴과 안면성
화법 중 “그는 동료들 앞에서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실패한 것에 대해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라는 표현에서 체면의 面 (face), 즉 , 얼굴이라는 명사는 머리의 전면부를 의미하는 신체 일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여기서의 ‘얼굴 ’은 한 사람의 평판을 의미한다 . 똑같은 단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 경우를 살펴보자 . “그녀는 이면성을 갖고 있다 ” 와 “그녀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 첫 번째 문장에서 그녀는 상황에 따라 다른 인격을 보이기 때문에 솔직하지 못하거나 기회주의적인 사람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 이것은 그녀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 반면 두 번째 문장은 얼굴 표면에 나타난 표정적 특징에 관한 것이다 . 하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녀의 얼굴을 슬프게 보이도록 만든 물리적 속성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한다면 쉽게 답하기 힘들 것이다 . 얼굴을 슬프거나 행복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구체적인 징표나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한 번 자문해보자 . 얼굴을 슬프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그리고 얼굴을 행복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체면 (얼굴 )을 잃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
얼굴이라는 개념이 간단치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
사람들은 중요한 계약 문건에 서명하기 전에 상대방과 직접 ‘대면 ’하기를 원한다는 일반적인 업무관행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람의 얼굴은 정체성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다 . 상대방과 그 사람의 회사를 단순한 문건으로 대신하는 것은 충분치 않은 것이다 .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라 일컬어지는 것을 가장 신뢰할만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 세상에 그리고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드러나 보이는 자신의 얼굴이야 말로 바로 그 사람 자신이다 . 나는 무엇인가 ? 나는 누구인가 ? 여기 변웅필이라고 하는 한 한국 남자가 있다 . 우리는 해부학적 신체의 일부인 그의 얼굴을 길이 , 넓이 , 코의 모양새 , 유난히 갈색을 띤 눈동자 , 입 모양 등 무수한 특징을 가지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 이러한 생김새를 그의 신체적 정체성이라고 부르자 . 하지만 그는 또한 특정 사회와 문화적 환경 속에서 특정한 역사적 시대에 살고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 그리고 그의 사회적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 , 기타 관련 정체성과 함께 한국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도 거론하는 것이 적절하다 . 다시 말해 우리는 광범위한 관점으로 그의 신체적 (해부학적 ) 정체성과 비신체적 정체성을 구별할 수 있다 .
그의 비신체적 정체성은 신체적 정체성과 연관이 되어야 한다 . 어떻게 ? 작가의 신체적 정체성이 해부학적 신체 일부인 얼굴의 이목구비 생김새에 좌우된다면 , 기호론적 표시 간의 매우 복잡한 관계를 통해 , 그의 사회적 , 문화적 정체성과 같은 비신체적 정체성도 어느 정도는 그의 얼굴 윤곽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 우선 , 얼굴은 사람의 머리의 전면을 감싸고 있는 표면이다 . 이 표면 위에는 개인별로 다른 윤곽을 따라 오목하고 볼록한 다양한 이목구비가 놓여 있다 . 얼굴은 표면에서의 다양한 근육의 제스처 (움직임 )를 통해 무한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하나의 도구 또는 기계라 할 수 있다 . 발성을 특정한 문법 규칙에 따라 또렷하게 발음하는 방식을 언어 표현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러한 얼굴의 제스처를 얼굴 표현이라고 부르자 . 사실상 언어 표현에서의 각 언어 행동은 얼굴 표현을 수반하며 공명하고 , 이 둘은 모두 선행적으로 학습되고 부과된 복잡한 체계화에 따라 이루어진다 . 어법에 맞는 문장 (언어 표현 )이 ‘문법 ’이라는 발생 장치의 ‘가상 기계 ’에 의해 생성된다면 , 체계적으로 정리된 얼굴 표현은 안면성 (facialization)을 통한 표정화 (faciality) 라는 가상 기계에 의해 생성된다 .(예를 들어 , 눈썹을 약간 치켜 뜨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는 것으로 이해되며 , 내리뜬 눈은 소심이나 슬픔의 신호로 이해된다 .)
따라서 두 사람이 만날 때 이들은 이미 체계화되고 겹겹이 쌓여진 복잡한 체계를 통해 걸러진 얼굴표정을 짓게 되는 터라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대면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 즉 , 안면성 (facialization)라는 전제적 계층구조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의 정체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하게 된다 . 겹겹이 쌓인 기존의 체계화된 무감각한 층들로 가장하고 무장한 타인의 횡포스러운 응시를 떨쳐버리고자 할 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느끼는 절망감이란 . 대면의 상황에서 꾸며진 표정의 횡포를 어떻게 떨칠 것인가가 바로 화가 변웅필이 던지는 질문이다 .
2) 풍경으로서의 얼굴
오늘날 대학교에는 ‘조경건축 (landscape architecture)’이라 불리는 학문 분야가 있다 . ‘조경건축 ’이라는 명사구에는 특별히 ‘조경 ’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 . 물론 이것은 아시아에서 말하는 ‘풍경 (風暻 )’의 의미는 아니다 . 말 그대로 직역하면 풍경 (風暻 )은 바람의 경치를 뜻하는 것으로 자연 경치나 자연의 일부를 말한다 . 반면에 조경건축에서의 조경은 자연에 대한 인위적 배열 또는 ‘땅 ’이나 ‘자연 ’을 이미 정의된 일단의 범주와 분류에 따라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 자연의 일부인 땅을 주택개발이나 공원부지 , 또는 농경지 등으로 구획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해 , 조경은 땅의 일정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공간 조성을 의미하며 얼굴은 머리를 감싸고 있는 체계적인 공간 조성을 의미한다 . 이 때 머리는 신체의 맨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부학적으로 볼 때 신체의 일부가 된다 . 들뢰즈와 가따리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 땅은 조경을 통해 영토화된 것이다 . 영토화라는 말은 ,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시각적 인지를 위한 인지적 여과장치 역할을 하게 되는 , 사회적으로 그리고 /또는 문화적으로 조성된 분류체계를 이르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 조경이라는 개념은 구상적 (具象的 ; representational) 보기와 그리기를 가능케 하며 , 이로써 구상적 사고는 특정한 개념화 방식을 재촉한다 . 개념과 인지는 상호 제휴관계를 갖는다 .
전통적인 동양화에서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도록 (혹은 느끼도록 ) 독려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 따라서 전통적인 동양화가들은 구상화를 삼가고 대신 풍경화에서 보이지 않는 풍경 모티브 형상에 숨어 있는 가상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 그러다 보니 이들의 풍경화는 풍경 모티브에 내재되어 있는 기 (氣 )의 미학이라 할 수 있었다 . 즉 , 지세 (地勢 ) 혹은 산세 (山勢 )의 미학이었다 . 동양화가들은 , 어떠한 영토의 형상이든지 , 그 안에 드러나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이 힘을 자신의 수묵화나 서예 작품에 구체화하거나 내재화했다 . (이와 관련된 수묵화 입문은 프랑수아 줄리앙의 명저 ‘사물의 성향 ’(THE PROPENSITY OF THINGS) 참조 .)
풍경과 같이 얼굴도 하나의 표면으로 간주될 수 있다 . 얼굴과 풍경 모두 윤곽을 따라 생긴 주름 , 오목하게 패인 곳 , 볼록하게 나온 곳 등이 있다 . 그렇다면 얼굴의 풍경은 무엇일까 ? 반대편 산의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면 자연의 일부인 이 산골짜기는 아침 연무에 싸여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 이 때 이 산골짜기의 물리적 (자연적 )인 지형적 윤곽뿐 아니라 그 날의 기온이 공기 중에 형성된 연무의 성질과 계절에 영향을 주며 , 이들은 결국 산을 뒤덮고 있는 수풀에 독특한 정취를 주게 된다 . 이 모든 속성들이 한데 모여 이 산골짜기 특유의 분위기를 생성하는 것이다 . 혹은 ‘주위환경 (milieu)’이라고 해야 더 적합한 용어일까 ? 얼굴도 마찬가지다 . 우리가 ‘이 여인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고 말할 때도 우리는 ‘슬픈 ’ 얼굴을 정의하는 신체적 기준이나 징표 , 또는 특징을 꼭 집어 말하지는 못한다 . 그보다는 , 얼굴의 이목구비를 통해 표정을 만들어낸 것은 그녀의 독특한 주위환경이다 . 계절의 변화로 풍경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 일행이나 시간 , 또는 사회 /문화적 맥락 등 무수히 많은 주변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얼굴의 환경도 지속적으로 변한다 . 얼굴 윤곽에서는 윤곽 자체에 잠재해있는 가상적인 기 (氣 )가 발산한다 . 따라서 풍경화의 세 (勢 )나 기세 (氣勢 )의 미학은 초상화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 하지만 변웅필은 구상적 풍경화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탈영토화 를 거부하는 전통적 동양화 기법을 채용하지 않는다 .
그도 인간의 얼굴을 풍경화로 간주하기는 하지만 ,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얼굴 풍경을 탈영토화하고 있다 . 그는 구상적 초상화 기법을 채택한 후 자신만의 초상화법을 사용하여 , 가식적으로 꾸며진 얼굴을 탈영토화하기 위해 기지가 번득이는 많은 방법으로 얼굴의 풍경을 고의로 일그러뜨리고 , 손상시키고 변형시킨다 .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타인의 얼굴과 정체성을 보거나 대면할 때 , 그들만의 익숙하고 편안한 기성의 등식을 사용하여 그 얼굴을 습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습성에 맞서고 이를 거부한다 .
작가 변웅필이 제안하는 것은 얼굴의 말소가 아니라 , 표정의 형상화라는 가상의 기계를 통해 , 안심이 되긴 하나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구속하는 안면성 (facialization)으로부터 얼굴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 그리고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과 열린 환경으로서의 자연이 더욱 진솔하게 대면할 때 이것은 생의 가능성 (life-possibilities)의 새로운 지평을 향한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안면성 (facialization)와 영토화의 감옥에서 이루어지는 구상적 사고 , 구상적 보기와 만남의 작위적인 계층구조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현대 문명사회의 생활방식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찾게 된다 .
3) 팝 아트 미학의 해체 :
여러 다양한 얼굴 표정과 일그러진 얼굴을 한 변웅필의 확대된 자화상을 처음 접할 때 우리는 쉽사리 이들 작품을 팝 아트의 영역으로 분류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 앤디 워홀이 마오쩌둥이나 마릴린 먼로 , 또는 그 외 인기 팝 스타와 같은 한 시대의 우상의 형상을 거대하게 확대해 내걸었던 것과 똑같이 변웅필도 자신의 자화상을 확대해 내걸고 있다 . 그러나 변웅필을 팝 아티스트로 분류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 그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명성을 얻고 있는 기라성 같은 팝 아티스트들 보다 예술가로서 더 큰 포부를 지니고 있다 . 이들 사이의 매우 큰 차이를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
최근과 같이 텔레비전이 오락의 주 공급원인 소비 문화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관념과 상투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 우리 모두는 통조림처럼 판에 박힌 뉴스 , 정보 , 진실 , 음식을 소비하고 소화하는 능력을 가진 바보가 되어가고 있다 . 대중 시장에 유통되어 대량소비 되고 대량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은 깡통에 담긴다 . 그렇다 . 실크 스크리닝 기법으로 재탄생되고 전시와 갤러리 (fine-art gallery)에 걸린 모택동 , 존 F. 케네디 , 마릴린 몬로 , 김일성 , 조세프 스탈린 , 서태지 , 마돈나 등과 같은 우상들의 확대된 사진 이미지는 팝 아트의 일상적 광경이다 . 팝 아트와 같은 예술행위는 최소 두 가지 면에서 미술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 워홀은 기막힌 손재주를 이용해서 주로 버려진 신문이나 쓰레기통의 인기 잡지 , 혹은 빈민지역의 길모퉁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중매체의 친숙한 사진 이미지를 거대하게 확대해서 실크 스크리닝 기법을 이용하여 화랑 벽에 전시했다 . 이러한 방법으로 팝 아티스트들은 너무도 친숙한 우상의 이미지를 새롭고 뭔가 생각해볼 만한 대상으로 승격시켰다 . 일반적이고 친숙했던 것이 색다르고 낯설고 혹은 ‘탈영토화 ’ 되자 사람들은 멈춰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 그렇다 . 빅터 슈클로브스키가 20 세기 초 러시아에서 (이미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이도록 만들어 사람들이 진부한 생각과 고정관념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접근하던 사물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Ostranenie (낯설게 하기 )’) ‘기법으로서의 예술 ”이라고 하는 획기적인 논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는 예술의 기본 취지라 하겠다 . 또한 앤디 워홀과 같은 팝 아티스트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스스로를 신성시하던 ‘상류 문화 ’와 ‘상류 예술 ’의 후견인들의 코를 비틀었다 . 이들은 팝 스타라는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이미지로 ‘신성한 화랑 공간 ’을 침략한 것이다 .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볼 때 팝 아티스트들은 결국 유명인들의 팝 이미지를 재 -안면화 (re-facializaing)에 불과했다 . 진부한 표현으로 점철된 표정화 (facialization)된 이미지를 비판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어디에 있는가 ? 그러한 시도는 애초에 없었다 . 전혀 .
1990 년대 이후 아시아의 화가들은 회화에 팝 아트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 특히 중국의 화가들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과거를 예술적으로 문화 /역사적으로 해체하는 도구로 팝 아트 스타일을 활용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그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을까 ? 중국에서의 팝 아트의 유익한 효과는 조만간 고갈될 것이며 또 다른 종류의 형식주의와 문화적 표정화 (혹은 facialization)라는 꽁꽁 얼어붙은 상투적 관념에 갇히게 될 것이다 .
이것은 아시아 현대 미술의 문화적 ∙미학적 배경에 상반된다 . 변웅필이 시도하는 얼굴과 팝 아트 같은 얼굴 이미지의 탈영토화의 노력은 너무도 혁신적이고 심원하다 . 변웅필은 그의 작품으로 현대 미술이 애타게 갈망하는 신천지를 개척하고 있다 .
Faciality and Deterritorialization: Byen, Ung-Pil’s Recent Works
By Kai Hong, Ph.D.
1) Face and Faciality:
In such a locution as “He lied about his failure, because he did not want to lose his face in front of his colleagues”, the noun ‘face’ doesn’t refer to the body part which is the frontal side his head. Rather, the ‘face’ in the above sentence refers to his reputation as such. Then, again consider the following usages of the same word: “She is double-faced” and “She has sad face.” In the first sentence, the implication is that she presents different public personae in different situations, thereby being dishonest or opportunistic. It has to do with her identity. In the second sentence, on the other hand, it is about her facial features on the surface of it. Yet, we’d be hard put when we are asked to name the particular physical attributes about her face which makes her face sad, for there isn’t any marks and features criteria for making some face sad while some others happy. Indeed, let us ask: what makes a face a sad face? And, what makes a face happy face? And, again, what is it to lose one’s face?
It is clear that the notion of face is not simple.
One’s face is very intimately related to one’s identity, as we can see from such common business practices as people wanting to have a ‘face-to-face’ meeting before signing an important contractual document. It is not enough to written documents about him and his company. The implication is that his face is the most trust-worthy evidence of his reputed IDENTITY. He is what he is by virtue of the very face he has, or rather he presents to the world and perhaps to himself. WHAT AM I? WHO AM I? There is this Korean male person whose name is Byun, Ung-Pil, whose face, as an anatomical body part, can be given a precise description in terms of a certain length, width, a nose so shaped, eyes with that particular shade of brown, mouth in so formed, and ad infinitum. Let us call that as his physical identity. But he is also a social being, living in a particular historical period in a particular society and in a special kind of cultural milieu. It is, then, proper to also talk about his Identity as a Korean, meaning his national identity with its related further Identities like his Social Identity, his Cultural Identity and so on. In other words, we can differentiate, in broad terms, his physical (anatomical) identity from his non-physical identities.
His non-physical identities must related to his physical identity. How? If his physical identity lies in the particular way his face as an anatomical body part is composed of his facial features; then, his non-physical identities like his social and cultural identities must be somehow based upon his facial configuration through some very complex relationships of semiotic significations. To begin with, face is the surface area that covers the frontal side of human being’s head. On this surface are the various facial features of concave and convex kinds in an individualized configuration. It [the face] is an instrument or a machine that is capable of generating infinite number of facial gestures by varying muscular gestures (movements) on its surface. Call that facial expressions in the same way the vocal utterances articulated according to a certain set of grammatical rules are called linguistic expressions. As a matter of fact, each speech act of linguistic expression RESONATE with an accompanying facial expressions, both of which in accordance with some pre-learned and thusly imposed codification of complex kind. If the grammatical sentences (linguistic expressions) are generated by the ‘virtual machine’ of a generating device called ‘grammar’, then, the codified facial expressions are generated by a virtual machine of faciality through facialization. (The slight raising of eyebrow is immediately read as frown, to give an example. And, a down-cast eye as a sign of timidity or sadness.)
There is, then, no possibility of a face-to-face meeting between any two people, as they will be brining faces that have already been facialized filtered through a complex hieracrchy of layers of codification. Hence, the despotic regime of facialization makes one another’s identity impenetrable and frustrating. Despair, in a sensitive soul, to ever hope to cast aside another’s despotic GAZE which is masked and armed with impenetrable layers of pre-codification. How to cast aside the facialized despotism in any face-to-face meeting IS then the question for this artist.
2) FACE AS A Poong-Kyeong (LANDSCAPE?)
We have in today’s modern universities a professional academic program called ‘landscape architecture’. The noun phrase, ‘landscape architecture’ already implies a particular understanding the notion of ‘landscape’. It certainly is not what they in East Asia call ‘Poong-Kyeong’(風暻 ). In literal translation, Poong-Kyeong means simply the scene of wind, meaning the scene of nature or a slice of nature. On the other hands, landscape in landscape architecture refers to certain artificial setting up or organization of ‘land’ or ‘nature’ according a certain set of pre-established categories and classifications. Land from nature is compartmentalized into a site for housing development, as a site for a park, a field for crops, and so on. In other words, the landscape is a structured spatial organization which covers a certain section of the earth; and, in just the same way, the face is a structured spatial organization which covers the heard, while the head is an anatomical part of the body, even though it is on its top. The land has been territorializaed to borrow a term from Deleuze and Guttari into a landscape, if you will. It is a generic term for socially and/or culturally organized classificatory schemes which would eventually serve as the perceptual filter for any future visual perception. This notion of Landscape enables Representational Seeing and Painting and, in turn, the Representational thinking precipitated the particular way of conceptualization. Conception and Perception go hand in hand.
In traditional Oriental Art, they have already developed already in ancient times to go beyond what is visible and try to INCITE the viewers to somehow see (or feel) what is invisible.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traditional Oriental painters eschewed representational painting and strived to somehow actualize what is latent as virtual force in the invisible configuration of the landscape motives of their Poong-Kyeong Painting. Theirs was therefore the Aesthetics of Chi-energy forces that is immanent in their motives. It was therefore 地 勢 (the ki-energy force of the land) or 山 勢 (The Ki-energy force of the Mountain). In any territorial configuration, therein is latent Potential Forces and it is its actualization or make it immanent in their works of Ink-Painting or Calligraphy. (For a good introduction to this aspect of Chinese Ink Painting, see Francois Jullien’s remarkable book, THE PROPENSITY OF THINGS.)
Face can be looked upon as a surface area just like a landscape is. There are folds, concave parts and convex parts in this or that contours both in a face and in a landscape. What would be the Poong-Kyeong of a face?
A slice of nature, this mountain valley, as I look down from an opposite mountain peak, is shrouded in a morning mist and reveals itself in a peculiar mood of forlornness this morning. In this case, it is not just the physical (natural) topographical configuration but also the temperature of the day which affects the quality of mist that is formed in the atmosphere and the season of a year, thus giving this particular kind of coloring to the forest which covers the mountain . . . all these elements go together to create this particular kind of mood or is ‘milieu’ a better term? In a face too, when we say that his woman has a sad face, surely we cannot pin-point this and that marks and features kind of physical criteria as being responsible for the ‘sad’ face. Rather, it is a peculiar milieu her facial features configure together in order to give expression to. As the seasonal changes make the landscape appear in different moods, so does the facial milieu changes constantly as it does when in front of different companies, different times of the day or week, different social/cultural contexts, . . . and so on, ad infinitum. Facial milieu is nothing other than the emanating chi-energy-force field latent as virtual possibilities in the very configuration of his or her facial configuration. Therefore, the Aesthetics of Shie(勢 ) or 氣勢 is equally applicable to a Portrait Painting of faces. But Byun doesn’t take the traditional Oriental way of rejecting representational painting of landscape painting and its implied deterritorialization,
Although he, too, looks at Human faces as landscapes and tries to deterritorialize the facial landscape in an original style of his own. He embraces Representational painting of Facial Portraiture and then WILLFULLY distort, deface and deform the landscape of his face in many clever ways in order to deterritorialize the facialized Mask of the portraiture, which is his own. In such a way, he confronts the viewers and deny them their habitual reading of a face via their own familiar and comfortable set of ready-made equations they bring to SEEING and/or encountering another FACE, another Identity.
What BYUN proposes to do is not the erasure but the liberation of the face from the reassuring but ultimately imprisoning facialization by the virtual machine of faciality; and, it’d be the very first step towards a new horizon of life-possibilities in a more genuine encounters with one another as human animals and with nature as the open context in which to find a different mode living other than the one we have in modern civilization which is necessarily built on the arbitrary hierarchies of representational thinking, representational seeing and encounters in the prison of facializaiton and territorialization.
3) Deconstructing the Pop-Art Aesthetic:
When first encountering the blown-up huge Self-Portraits of Byun, Ung-Pil in many different facial gestures and defacements, it is easy to mistake his works falling within the categories of Pop Art. Just as Any Warhol mounted series of huge blown-up images of famous icons like Mao or Monroe or other Pop stars, so does Byun with his own self portraits. It’d be, however, a mistake to take Byun to be a Pop Artist. He entertains a larger ambition as an artist than the Pop Artists of much better reputation. The difference is huge. Let me explain:
In the late Capitalist Societies of consumer culture, in which Television is the main provider of our enlightenment, everything becomes stereotypes and clichés. We all become simpletons who are capable consuming and digesting only the canned news, anned information, canned truth, and canned food. Everything has to be canned before it can be mass-marketed and mass-consumption-capable and massive-profit-generate-able. Yes, the blown up photographic images of such icons as Mao Tse-tung, John F. Kennedy, Marilyn Monror, Kim Il-sung, Joseph Stalin, Seo Tai-Ji, Madonna, etc redone in silk-screening and mounted in Fine Art Gallery Show Rooms as Fine-Art-Exhibition is the usual scene of Pop Art. There are at least two senses in which such Art-practices as Pop Art had art-historical importance. By a slight of hand, Warhol was turning ubiquitous mass media images of photographic kind, usually to be found on the pages of thrown-out newspapers and popular magazines in trash cans or on the street corners of every ghetto; in blowing up the familiar image and silk-screening and then mounting on Gallery Walls, the Pop artists were elevating the all-too-familiar iconic images into something to look ANEW and think about. The common and familiar have been made STRANGE or ‘defamiliarized’ or ‘deterritorialized’ so that people can stop and re-think. Yes, that is what is art is all about as Victor Shklovsky said, famously, in his path-breaking article in early 20th century in Russia called “Art as Technique (of ‘Ostranenie’ or ‘Defamiliarization’, to make something familiar look strange so that they are forced to re-think about things about which they approached only through the prism of clichés and stereotypes). Then, too, the Pop Artists like Andy Warhol were twisting the noses of the self-sacrosanct and self-important guardians of ‘high culture’ and ‘high art’. They’ve invaded the ‘sacred gallery spaces’ with common and clichés images of Pop Stars.
However, there’s a sense in which the Pop Artists were merely re-facializing the Pop Images of famous people; where were the attempts to critique and liberate from the cliché-ridden facilized images? None, what so ever.
Since the 1990s, East Asian painters embraced high Pop Art style in their paintings. Especially in China, they were hugely successful in making use of the Pop Art style as a means of artistic and cultural/historical deconstruction of their Socialist-Realist Past. How long, however, can you go on with it? Sooner or later, you are bound to exhaust such salutary effects of Pop in China and become merely another kind of academism, a cultural territorialization (or facialization) into frozen clichés.
It is against this cultural and aesthetic background of contemporary Asian Art that Byun, Ung-Pil’s efforts at DETERRITORIALIATION OF THE FACES, THE POP-ART-LIKE FAICAL IMAGES are so innovative and profound. He is breaking a new ground. His is a sorely needed Tour de Force contemporar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