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3&aid=0000024398

 

 

 

언어로 집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삽이나 곡괭이, 망치와 달리 언어에는 아무런 물리적 위력이 없다. 그럼에도 그 허약한 언어로 고유한 세계를 지으려 분투하며 그 안에 인간의 내면과 세상살이의 속내를 두루 담으려 애쓰는 이들을 우리는 작가라 부른다. 언어라는 도구에 의존해 자신만의 성을 짓고 사는 데 익숙한 작가들이 동료 시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시대와 마주했을 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지난 10월 22일 ‘작가행동1219’(@1219writer)의 이름으로 트위터에 140자 글이 올라왔다. “사람과 사회와 정치에 대해 특정 후보 지지가 아니라 정치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도록 작가행동을 제안합니다.” ‘1219’는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일을 가리킨다. 취지는 이렇다. “우리가 문학을 추구하는 이유가 결국 다른 세계를 향한 꿈 때문이라면, 우리는 현실에서도 다른 세상을 위해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은 관심으로 쓰는 문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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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밤 ‘작가행동1219’ 북콘서트에서 김애란 소설가(맨왼쪽)가 작품을 낭독하고 있다. 왼쪽 두 번째부터 차례로 백가흠(소설가), 김연수(소설가), 한강(소설가), 김선우(시인·소설가). | 정원식 기자

 

방법은? “시인, 소설가, 아동문학가, 평론가, 극작가 등 글을 쓰는 우리는 지금부터 각자의 트위터를 통해 정치적 문장을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계정이 없는 문인의 문장은 대표 계정을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트위터 통해 정치적 문장 적극 개진키로
온라인에서 ‘정치적 문장’을 쓰는 것만으로 ‘행동’이라 칭할 수는 없다. 이들은 오프라인으로 나갔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출발한 생명평화대행진단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인 11월 3일에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36명의 문인이 문화예술인 동조단식에 참여했다. 11월 13일에는 홍익대학교 근처 한 지하 공연장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 작가들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들일 독자들을 상대로 한 일종의 홍보활동이다. 이날 진행을 맡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이 저간의 사정을 요약한다.

 

“2009년 용산에서 용산참사가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이 투신하고, 쌍용차에 대한 폭력진압이 있었다. 그 무렵에 젊은 문인들이 ‘6·9작가선언’이라는 조직을 급히 꾸려서 시국선언을 했다. 그때는 이명박 정부 초기였는데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 번 모이자고 해서 모였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정말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선거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누구를 지지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선거라는 수단을 등에 업고 우리가 잊고 있던 걸 환기해보자, 독자들과 글로만 소통할 게 아니라 같이 얘기를 나눠보자는 취지로 모였다.”

 

용산참사 시국 참여 6·9작가선언 연장선
‘작가행동1219’(작가행동)에는 명칭과 로고는 있지만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작가행동은 작가들의 느슨한 연대로 이뤄진 네트워크다. 구성원이 몇 명인지도 특정할 수 없다. 작가행동의 취지에 공감하는 모든 이들이 이 조직의 일원이다. 이들이 벌이는 행동도 ‘통보’가 아니라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떤 활동에 참여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 연령상으로는 20~40대 초반까지의 젊은 문인들이 주축이다. 수직적 조직은 없지만 연락과 의사교환을 위해 징검다리 구실을 하는 이들은 있다. 작가 10여명이 작가행동 트위터 계정을 공동으로 운영하며 메일을 주고받는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작가행동은 6·9작가선언의 연장선에 서 있다. 용산참사와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이라는 2009년 상반기의 두 비극적 사건은 문인 188명이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라고 외친 6·9작가선언을 낳았다. 이 선언 이후 문인들은 용산참사 현장을 지키거나 4대강 공사 현장과 도심 철거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 무렵부터 2012년 사이에 작가들의 감수성을 타격하는 사건들이 몇 가지 더 발생했다. 올해까지 쌍용차 해고노동자 당사자와 가족을 포함한 23명이 목숨을 끊었고, 지난해에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고공농성과 희망버스가 있었다. 제주 강정마을에서의 해군기지 건설 중단 농성도 격화했다. 공통점이 있다. 먼저 커다란 권력과 자본의 힘이 공권력 또는 용역폭력의 힘을 빌려 당사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심각한 정신적 내상을 초래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수성과 탈환을 두고 벌어지는 여야의 정치적 쟁투가 이 모든 이슈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망각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빼놓을 수 없는 마지막 공통점은 차기 정권의 향방에 따라 사회적 해결의 가능성이 제로로 수렴될 수도 있는 사안들이라는 것이다.

 

고통받는 피해당사자들의 말 경청
작가행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백가흠 소설가의 말이다. “지난 5년 동안 우리가 여러 일을 겪었다. 그때마다 작가들의 자의식이 발동하고 무기력함도 컸다. 3년 전 작가선언은 글만 쓰던 작가들이 개인 작업을 넘어 사회적 소통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이제 대선을 앞에 두고 있다. 이번에 또다시 실패하게 된다면 산적한 현안들의 매듭을 풀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이 너무 크다. 그래서 이제 더는 망설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젊은 친구들이 모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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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밤 ‘작가행동1219’ 북콘서트에서 이자영씨가 편지를 읽고 있다. 오른쪽에 앉은 이는 쌍용차 해고자인 남편 이창근씨. | 정원식 기자

 

이렇게 본다면, 작가행동1219는 3년 전 ‘6·9작가선언’에서 뜻을 모아 행동으로 나아갔던 문인들이 대선이라는 중대한 정치적 분수령을 맞아 또 한 차례 사회적 행동에 나선 ‘작가행동 시즌 2’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6·9작가선언 당시에는 시인들이 전면에 나섰다면, 작가행동1219는 소설가들의 활동이 더 도드라진다. 또한 6·9작가선언 당시에는 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명단이라는 것이 존재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명단은 없다.

 

그렇다면 작가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란 어떤 것일까. 일단은 사회가 유발한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김애란 소설가는 “여기저기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회가 답답했다”고 말했다. 11월 13일 북콘서트는 ‘경청’의 시작이다. 이날 콘서트에는 김연수(소설가), 김애란(소설가), 백가흠(소설가), 한강(소설가), 김선우(시인·소설가) 등 40대 이하 문인들 중 ‘동원력’이 가장 높은 작가들이 무대에 올랐다. 1부는 이들의 작품 낭독. 콘서트의 주제이자 하이라이트는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씨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 2부였다.

 

이창근씨의 아내 이자영씨는 준비한 편지를 읽었다. 쌍용차 사태 이후 유성기업과 한진중공업에서 비슷한 일들을 마주하면서 “나도 다 안다고. 나도 다 겪었다고. 그러니 내 앞에서 더 얘기하진 마. 제발…”이라고 되뇌면서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 “정말이지 그 자리에 서 있는 상황만으로도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 건데” ‘힘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거슬렸던 경험을 담담히 적은 편지다.

편지 말미에서 이씨는 “저는 저의 고통을 비판 없이, 있는 그대로 들어주신 분들 덕에 되살아났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콘서트장의 작가들과 청중들에게 말했다. “누가 제 얘길 숨소리 하나 안 들리게 들어주신다는 게 저한테는 저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흡수해주시는 것 같아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받고 무한한 힘이 되고 있습니다.”

 

강정마을 ‘작은 도서관 네트워크’ 추진
김선우 시인은 “대한문 앞 쌍용차 천막을 한 번 들여다보면서 얼굴도 보고 커피캔도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쑥스러워서 잘 못한다. 사회적인 연대의 훈련이 잘 돼 있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데, 그 쑥스러움에서 한 발 나아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위를 보여줄 때 사회에 누적된 절망감을 조금씩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연수 소설가는 “쌍용차 사태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나도 대한문 앞을 그냥 지나가던 사람 중 하나였다. 오늘 여기 와달라는 제의를 받고 반가웠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싶고 다음에는 이보다 한 걸음 나아가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백가흠 작가는 “결국 작가들이 하는 일은 남을 보고 남의 일을 글로 쓰는 것인데, 문학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하면 무기력할 때가 많았다.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한 것들을 침묵하면서 받아들이며 살아온 것이 옆의 이웃들의 고통으로 나타나는 시절인 것 같다. 오늘은 연대를 연습하는 자리이고 그 첫걸음은 고통받는 사람의 말을 듣는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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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에서 그칠 일은 아니다. 작가행동은 11월 21일에는 제주 강정마을로 간다. 21명이 함께 간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 작가들은 마을을 떠난 주민들의 집에 작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책을 넣어 ‘작은 도서관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작정이다. 해군기지가 들어오기 전에 강정마을을 “책으로 무장하는” 일이다. 그 후에는 비정규직 문제와 언론의 문제를 다룬다. 작가들의 뜻을 모아 즉흥적으로 행동계획을 결정하는 탓에 비정규직과 언론 문제 이후의 이슈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대선 직전까지는 매주, 대선 이후에도 매달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뭉칠 계획이다.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문인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2009년 1월 이후 미술인, 음악인, 영화인, 만화가들은 저마다 ‘파견 미술가’ ‘현장 음악인’ ‘다큐 작가’ ‘르포 만화가’를 자처하며 현장을 지키고, 현장에서 느낀 사회적 부조리를 혹은 행동으로 혹은 작품으로 알려 왔다. 활동무대도 현 정부 출범 이후 갈등의 현장들을 두루 망라한다. 특정 그룹에 소속돼 있지 않지만, 정치를 풍자하며 일반인들의 인식에 충격을 주는 활동을 하는 예술인들도 있다. 지난 11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얼굴을 합성한 포스터를 제작해 붙이다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된 팝아트 작가 이하씨가 대표적이다.

 

분야는 달라도 예술가들의 마음의 궤적은 비슷한 듯하다. 작가행동1219의 로고를 도안한 변웅필 화가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행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믿음이 희미해질 때 정신이 번쩍 들도록 빠악! 그것은 분노의 주먹에 붕대를 감는 것이다. 분노가 상처로 남지 않도록 돌돌돌. #작가행동1219.”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