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162209185&code=960202

 

 

 

 

ㆍ일그러진 얼굴을 통한 편견에 대한 저항

 

l_2013121701002519100198161.jpg

 

캔버스에 유채, 2008

 

100점이 넘는 자화상에 굴곡진 삶의 여정을 기록한 렘브란트, 격정의 세월을 40여점의 얼굴 속에 담은 반 고흐, 검은 배경 속에 얼굴만 유독 밝게 처리하는 방식으로 예술가의 권위와 존재성, 두려움 없는 자존감을 강조한 뒤러, 지인들의 불행과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며 48세라는 짧은 삶을 보내야 했던 생의 일면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윤두서의 자화상.

 

이들의 공통점은 자화상을 통해 자기 성찰과 자의식을 내비치고 광기에 분노를 터뜨리거나 힘든 삶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견고히 했다는 것에 있다.

 

흡사 그림일기처럼 존재의 본질을 사유하며 역경과 고난의 시간을 기록하는 한편, 시대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활용했다는 사실도 공통분모로 꼽힌다. 때문에 예술가의 자화상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언어이자 의식작용을 대리하는 수행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 변웅필의 대표 연작 가운데 하나인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2008)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의 뼈대로 하고 있다. 2006년 이후 지금까지 오랜 시간 ‘나’를 화두로 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화상에서 드러나는 보편적인 자기애와 예술가로서의 자긍심, 고집스러운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손이나 기타 사물로 얼굴을 가린 채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 연작에선 자화상 고유의 특징인 작가 개인의 개성은 읽기 어렵다.

 

분명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있음에도 의상과 머리털, 성별, 인종, 연령 등을 고의적으로 배제해 되레 불특정한 누군가로 치환시켜 놓았다. 이러한 익명성은 일반적인 자화상과 구별되는 근본적인 차이이자 변별점이다.

 

그의 감춰진 얼굴 작업은 유럽에서 유학할 당시 경험한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과 인종차별, 소통의 부재를 근간으로 한다. 피부색과 언어 등 외적인 것에 의해 판단되고 규정되는 사회 속 편견을 뿌리로 하고 있다. 이에 작가는 개인의 성격을 나타내는 독립적 기호들을 지워버리고 얼굴 표정마저 자의적으로 망가뜨림으로써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중요성을 말한다.

 

색안경을 만드는 여러 장치들을 걷어냄으로써 본디 지니고 있는 인간 자체를 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은 현실인이자 예술가이기도 한 개인의 모습을 투영함과 동시에 주체이면서 타자이기도 한 현대인의 모습을 지정한다.

 

특히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경계 없는 주변인의 삶을 살고 있는 이 시대 젊은 청춘들을 상징하는 보편적 초상으로까지 확장된다.

결국 그의 자화상은 특정한 누군가를 가리키는 매명(每名)이면서 불특정한 누군가로 해석 가능한 매명(埋名)일 수도 있는 셈이다. 이것이 다른 자화상 작품들과 다른 지점이요, 변웅필 작업이 지닌 특징이다.

 

10여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작가는 현재도 대상을 불특정인으로 변환한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무제-외모에 대한 부담감’(2011)을 비롯해 ‘무제-나와 또 다른 나’(2011), ‘한 사람’ 연작(2012) 등을 통해 성별에 따른 섣부른 태도, 직업과 사회적 위치에 따른 계급적 판단 등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정관념과 편견들로부터 나와 우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되묻는 것이다.

 

비록 “나라가 이 모양인데…. 작업하는 시간보다 신문 읽다 한숨 쉬는 시간이 더 잦다”고 말하지만.

 

홍경한 | 미술평론가·월간 경향아티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