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독일 국경을 넘나든 ‘존재’에 대한 예술적 공감

 

입력 : 2023-07-20 20:41:52 수정 : 2023-07-20 23:39:20

 

‘베를린에서 서울로:지평선 넘어’展

현대미술가 16인의 특별교류전 개최
韓·獨 작가 각 8인의 작품 83점 전시
2022년 베를린서 열린 협업전의 연장
동시대적 감성의 예술적 재해석 눈길

레만, 고대 신화를 현대식으로 풀어내
‘분단’ 목격한 헤르만의 통찰력 돋보여
본슈틱, ‘재활용’으로 존재 의미 재부여
변웅필, 서양화 기법·동양화 방식 병행

 

 

빈 병, 낡은 장난감, 깨진 전구, 담배꽁초 등이 작가의 ‘문화적 재활용’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다.

독일 작가 프리츠 본슈틱의 그림은 버려진 문명의 잊혀진 잔재들로 구성된다. 그는 이러한 쓰레기들을 종종 자연과 함께 배치해 버려진 상태를 더욱 강조하기도 한다. 버려진 물건들은 그의 붓터치를 통해 새로 자라는 꽃의 거름이 되기도 하고, 때론 더러운 모습 그대로 주목받기도 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다시 부여받는다.

 

프리츠 본슈틱, ‘Turducken Prince’(터덕킨 왕자).

 

작가는 종종 갑자기 떠오르는 단어를 작품명으로 정한다. Turducken은 뼈 없는 칠면조 요리. 기호나 부호를 제목으로 붙이는 것과 같다.

영화, 팝송 등 대중문화에서 이웃 쓰레기통 내용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처로부터 영감을 얻는 그의 작업은 인류의 여러 파편들을 관찰하고 수집하는 과정을 바탕에 깔았다. 작가는 이렇게 모아 온 수집품들로 진정성과 아이러니, 태연함과 노스탤지어, 우울함과 희망 등 밸런스를 유지해내면서 현대 사회의 가치체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송지혜는 평소 자신이 경험한 사실들을 틈틈이 스케치하고 내밀한 감상을 그림에 온전히 담아내길 즐긴다. 그의 그림은 오늘을 옮겨 적는 일기처럼 사적이면서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복잡미묘한 감수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송지혜, ‘Sommer in der WG’(공유주택에서의 여름).

 

축 처지고 늘어진 일상을 한 장면에 담았다.

축축 늘어지는 그림 속 인물들은 휴식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몸짓한다. 처지고 무기력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정지 버튼을 누르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송지혜의 선언 같은 권태에는 자기를 안위하는 낭만이 있다. 무기력해 보이는 인물들의 진실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도약 직전의 상태이다. 그림 속 인물들이 멈추거나 엎어져 있지만 동시에 생생함을 간직한 이유다.

 

 


한독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과 독일 현대미술가 16인의 특별교류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초이앤초이 갤러리와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 AIF라운지 세 곳에서 8월24일까지 동시에 선보이는 ‘베를린에서 서울로: 지평선 넘어’전이다.

 

지난 10여년간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두 나라 미술을 양국에 소개해 온 최진희·최선희 초이앤초이 갤러리 공동대표가 구상하고, ‘능숙한 기획자’로 알려진 김윤섭 미술평론가가 전시의 방향을 잡았다. 최진희·최선희 대표는 베를린, 런던, 파리, 제네바에 걸쳐 광범위한 아트 네트워크를 구축한 쌍둥이 자매다.

이번 협업전은 지난해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 서울을 만나다(Berlin meets Seoul)’ 단체전의 연장선에서 한국 작가 8명과 독일 작가 8명의 선별된 작품 83점을 소개한다. 작가들은 각각 다른 방식의 작품을 보여주지만, ‘정체성’과 ‘존재’라는 공통된 주제를 통해 국경을 넘나드는 예술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두 나라 미술가들이 동시대적 감성을 어떻게 재해석해 나가는지 비교해 볼 수 있다.

데이비드 레만, ‘Die Lila Stunde’(보라색 시간)

데이비드 레만은 고대 신화를 현대식으로 풀어 새로운 내러티브를 창조한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 상태를 형상화한다. 그의 캔버스에는 춤추듯 역동적이고 즉흥적인 붓질부터, 솜털의 섬세한 결로 빚은 듯 세심한 붓질이 공존한다. 유화물감, 구리 산화제, 스프레이 페인트 등 다양한 재료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율법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회화 본연의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20세기 대형 추상화를 잇는 세바스티안 하이너는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지역을 오랜 기간 여행했다. 중국 추상 표현주의 영향을 받은 그의 추상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그의 초현실적 세계는 어린 시절 상상을 반영한다. 기하학적으로 구조화된 회화가 특징이며, 인류 문명을 장악한 기계 존재가 지배하는 미래 세계를 보여준다.

헬레나 파라다 김, ‘Serapion’(세라피온)

헬레나 파라다 김은 이민 1세대인 한국인 간호사 어머니와 스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독일 쾰른에서 자랐다. 우연히 보게 된 어머니의 옛 앨범 속 파독 간호사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고, 이후 한국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복, 제사 등을 자주 그렸다. 특히 누군가가 입었던 ‘전통 한복’이 지닌 서정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스토리를 주제로 다양한 연작을 만들었다. 그의 그림 속 한복은 한 개인의 역사에서 집단 역사 탐구로 확장된다. 특정 시대 어느 순간으로 관람객들을 인도한다.

 

 

피터 헤르만, ‘Lady with an organ player’(여인과 오르간 연주자).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그린 ‘Venus with Organ player’(비너스와 오르간 연주자)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

피터 헤르만은 동독과 서독의 분단을 목격했다. 1984년 동독에서 함부르크로 탈출해 1986년부터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일상 속 삶을 관찰하고 인물과 도시 풍경, 주변 사물 등을 그린다. 유머러스하고 풍자가 느껴지는 화면은 보는 이의 미소를 자아낸다. 꿈이나 동화 같은 이미지를 그린다.

레프 케신, ‘lxivit’(그는 죽었다). 마치 보석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놀랍게도 라틴어로 ‘그는 죽었다’는 제목을 붙였다. 가상의 이미지일 뿐 설명하기 위한 제목은 아니라고 한다.

실리콘과 색채는 레프 케신 작품의 차별적 특징이다. 오일과 붓을 실리콘과 스파출라(주걱)로 대체했다. 그는 부드러운 실리콘에 안료를 혼합하고, 부분적으로 펴 바른다. 섬세하게 배합된 작품은 마치 광물이나 보석을 보는 것 같다.

 

 

로버트 판, ‘AG 6,851 EZ’. 그의 작품 제목들은 모두 우주 좌표를 따서 지은 것들이다.

로버트 판은 25년 이상 레진 작업을 통해 그만의 추상 세계를 창조해왔다. 반짝이는 색상, 모양, 패턴, 점, 구조로 이루어진 마이크로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마법 같은 풍경, 먼 은하계, 화학 과정 등을 떠올리게 한다. 피터 바이 어마이어는 그를 ‘색채의 연금술사’라고 호평했다.

 

 

변웅필, ‘Someone’(어떤 사람)

변웅필의 인물화는 서양화 기법을 보이지만 비워 두기를 반복하는 동양화 방식을 병행한다. 독일 체류 때부터 시작한 자화상 시리즈는 감정 없는 표정에 머리카락, 눈썹, 피부색 등 인물을 알아볼 수 있는 요소들을 지워내 왜곡하고 추상화한다. ‘너무도 주관적 시선인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 피부색으로 인한 인종 차별, 성별에 따른 섣부른 태도, 그리고 직업과 사회적 위치에 따른 계급적 판단 등 수많은 선입견과 편견들로부터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는 작가는 인물화를 그리면서도 그러한 구체적 디테일을 내려놓는다. 보는 이가 자신만의 서사를 투영할 수 있도록, 내면의 감정 및 사념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세바스티안 하이너, ‘The Ambassadors’(대사들)

데이비드 레만, 프리츠 본슈틱, 헬레나 파라다 김, 레브 케신, 피터 헤르만, 로버트 판, 세바스티안 하이너, 수잔느 로텐바허, 남신오, 정소영, 정재호, 송지혜, 송지형, 이태수, 변웅필, 전원근이 참여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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